분체도료 제품정보 · 안료와 색상

분체도료 색상의 한계는 어디서 오는가 — 유기안료·무기안료·은폐력 완전 정리

디자인 도면에 색 번호를 적어 보냈는데 "그 색은 분체도료로 어렵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도료 회사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색이라는 것은 안료 하나로 결정되지 않고, 빛의 흡수와 산란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광학 현상이 동시에 만족되어야 구현됩니다. 여기에 분체도료만의 제약이 얹힙니다.

분체도장된 흰색, 황색, 적색, 흑색 시편과 소지가 비쳐 보이는 반쯤 도장된 황색 시편

1. "그 색은 어렵습니다"라는 답의 정체

분체도료 색상 문의는 대부분 이런 형태로 들어옵니다. 플라스틱 사출물 샘플을 주면서 "이 색으로 맞춰 주세요", 또는 RAL 색상 칩을 보내면서 "이 번호로 해 주세요". 그리고 며칠 뒤 "이 색은 어렵습니다" 또는 "가능은 한데 단가가 세 배입니다"라는 회신을 받습니다.

이 답변은 보통 네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경우 1. 은폐가 안 됩니다

색 자체는 만들 수 있는데, 정해진 도막두께에서 소지(素地)가 비쳐 보입니다. 밝은 황색, 오렌지, 일부 적색에서 흔합니다.

경우 2. 열을 견디지 못합니다

안료가 경화 온도에서 변색되거나 분해됩니다. 분체도료는 제조 시 압출, 도장 시 소부라는 두 번의 열이력을 거칩니다.

경우 3. 원가와 외관이 함께 무너집니다

구현은 되지만 고성능 안료를 많이 넣어야 해서 도료 단가가 크게 오릅니다. 안료가 늘어난 만큼 도막이 매끄럽게 펴지지 않아 레벨링과 광택도 나빠집니다.

경우 4. 기준 샘플을 재현할 수 없습니다

기준이 플라스틱이나 아노다이징처럼 다른 소재·다른 광택일 때, 측색기 수치는 맞춰도 눈에는 다르게 보입니다.

이 글은 위 네 가지가 왜 생기는지를 기본 원리에서부터 순서대로 풀어갑니다. 도료의 구성 요소 자체가 궁금하시다면 분체도료의 구성(수지·안료·체질·첨가제) 글을 먼저 보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한 가지 범위를 미리 정해 두겠습니다. 이 글은 순색(solid color)을 다룹니다. 메탈릭과 펄은 구형(球形) 안료의 흡수·산란이 아니라, 편상(片狀) 안료가 도막 안에서 어떻게 배향되어 빛을 정반사하는가라는 완전히 다른 원리로 색을 만듭니다. 이쪽은 메탈릭 분체도료, 펄 분체도료 알아보기에서 따로 다루고 있습니다.


2. 색은 두 가지 원리로 만들어진다 — 흡수와 산란

초보자가 가장 먼저 넘어야 할 벽이 여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안료가 색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절반만 맞습니다.

도막에 빛이 들어오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흡수 absorption

  • 안료 분자가 특정 파장의 빛을 삼킵니다
  • 삼키고 남은 파장이 우리 눈에 색상으로 보입니다
  • 청색 안료는 적색 파장을 흡수한 결과입니다
  • 흡수가 강할수록 착색력(tinting strength)이 큽니다

산란 scattering

  • 안료 입자가 빛의 진행 방향을 꺾습니다
  • 꺾인 빛이 도막을 되돌아 나오면 아래가 안 보입니다
  • 이것이 은폐력(hiding power)입니다
  • 산란이 없으면 색은 있어도 투명에 가깝습니다
도막 안에서 빛의 흡수와 산란을 비교한 단면 모식도
그림 1. 흡수는 색상을, 산란은 은폐력을 결정합니다. 두 현상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핵심은 이 둘이 서로 독립된 변수라는 점입니다. 색이 진하다고 해서 잘 가려지는 것이 아니고, 잘 가린다고 해서 색이 선명한 것도 아닙니다. 유리에 색을 입힌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면 쉽습니다. 색은 강렬하지만 뒤가 다 비칩니다. 흡수는 강하고 산란은 약한 상태입니다.

교과서와 현장의 간극

교과서적으로는 "안료를 더 넣으면 은폐력이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밝은 황색 도료에 황색 안료를 계속 더 넣어도 은폐가 되지 않는 일이 생깁니다. 유기 황색 안료는 흡수는 늘려주지만 산란에는 거의 기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은폐를 시키려면 산란을 담당하는 백색 안료를 넣어야 하는데, 그 순간 색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이 딜레마가 밝은 색 개발의 본질입니다.


3. 은폐력의 원리 — 굴절률 차이와 입자 크기

산란이 얼마나 일어나는지는 두 가지가 결정합니다. 굴절률(refractive index) 차이입자 크기입니다.

3-1. 굴절률 차이가 클수록 많이 꺾인다

빛은 굴절률이 다른 두 물질의 경계면에서 방향이 꺾입니다. 도막 안에서 그 경계면은 수지와 안료 입자 사이입니다. 둘의 굴절률이 비슷하면 빛은 거의 직진해서 통과하고, 차이가 크면 크게 꺾입니다.

도료용 수지(바인더)의 굴절률은 대체로 1.55 부근입니다. 여기에 어떤 안료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주요 물질의 굴절률 비교 (수지 기준 약 1.55)
물질굴절률 (n)수지와의 차이산란 기여
이산화티타늄 루타일형(흰색) rutile TiO2약 2.7+1.15매우 강함
이산화티타늄 아나타제형(흰색) anatase약 2.55+1.00강함
산화철(적색·황색·흑색) iron oxide약 2.3~3.0+0.75~1.45강함
황산바륨 BaSO4 (체질)약 1.64+0.09거의 없음
탄산칼슘 CaCO3 (체질)약 1.6+0.05거의 없음
유기안료 organic pigment약 1.5~1.7-0.05~+0.15거의 없음

표에서 바로 보이는 사실이 있습니다. 유기안료는 수지와 굴절률이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도막 안에서 빛의 입장에서는 "거기에 입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색은 내지만 가리지는 못하는 이유입니다.

같은 이유로, 체질안료(extender)인 황산바륨이나 탄산칼슘도 은폐에는 기여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도막의 두께와 물성을 채워주는 역할이지, 색을 가려주는 역할이 아닙니다.

원리 심화 — 굴절률 차이가 산란에 미치는 영향

입자에 의한 빛 산란의 세기는 입자와 매질의 상대 굴절률 m = n안료 / n수지 에 크게 의존합니다. 입자가 파장보다 충분히 작을 때 성립하는 레일리(Rayleigh) 근사에서는 산란 세기가 아래 항에 비례합니다.

S  ∝  [ (m2 - 1) / (m2 + 2) ]2

루타일 TiO2 : m = 2.70 / 1.55 = 1.74  →  0.163
일반 유기안료 : m = 1.65 / 1.55 = 1.06  →  0.0018

약 90배 차이 주의: 실제 도료용 안료의 입경(약 0.2~0.3 마이크로미터)은 가시광 파장과 같은 수준이라 엄밀하게는 레일리 산란이 아니라 미(Mie) 산란 영역에 속합니다. 위 계산은 굴절률 차이가 왜 결정적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비교이며, 배합 설계에 쓰는 값이 아닙니다.
굴절률 2.7인 이산화티타늄과 1.65인 유기안료 입자에서 빛이 꺾이는 정도 비교
그림 2. 수지(n = 1.55)와 굴절률 차이가 클수록 빛이 크게 꺾여 산란됩니다.

3-2. 입자 크기에는 최적값이 있다

안료는 잘게 갈수록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산란 효율은 입자 지름이 산란시킬 빛 파장의 약 절반일 때 최대가 됩니다. 가시광선이 380~700나노미터이므로, 최적 입경은 대략 280나노미터, 즉 0.28마이크로미터 부근입니다. 실제 도료용 루타일 이산화티타늄이 0.2~0.3마이크로미터로 만들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사실은 현장에 직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안료가 뭉쳐 있으면(응집) 은폐력이 떨어집니다. 같은 양의 이산화티타늄을 넣어도 분산이 나쁘면 유효 입경이 커져서 산란 효율을 잃습니다. 분체도료 제조에서 압출(extrusion) 공정의 분산 품질이 곧 은폐력으로 직결되는 배경입니다.


4. 유기안료와 무기안료, 무엇이 다른가

앞의 원리를 이해했다면 이 비교는 저절로 읽힙니다.

유기안료와 무기안료의 일반적 특성 비교 (개별 제품 편차 있음)
항목무기안료 inorganic유기안료 organic
은폐력우수 (굴절률 높음)낮음 (수지와 굴절률 유사)
채도 / 선명도탁하고 차분함선명하고 강렬함
착색력낮은 편높음 (소량으로 색이 남)
내열성우수 (산화물은 이미 안정된 상태)종류별 편차 큼, 분해·색상 변화 가능
내후성대체로 우수편차 매우 큼 (아래 설명)
가격저렴고가, 고성능급은 특히 높음
규제 리스크중금속계는 규제 대상상대적으로 낮음
대표 예이산화티타늄(흰색), 산화철(적색·황색·흑색), 카본블랙(흑색), 산화크롬그린(녹색)프탈로시아닌(청색·녹색), 퀴나크리돈(적색·자색), DPP(적색·주황), 아조계(황색·주황·적색)
오래된 통념 하나를 바로잡습니다

"유기안료는 내후성이 나쁘다"는 설명을 자주 보게 되는데, 지금은 맞지 않는 일반화입니다. 퀴나크리돈(quinacridone, 적색·자색), DPP(diketopyrrolopyrrole, 적색·주황), 프탈로시아닌(phthalocyanine, 청색·녹색), 페릴렌(perylene, 적색·적갈색·흑색) 같은 고성능 유기안료(HPP, High Performance Pigment)는 내후성이 매우 우수해서 자동차 외장과 건축 외장에 쓰입니다. 내후성이 약한 쪽은 주로 값싼 아조(azo)계 범용 안료(황색·주황·적색)입니다. 따라서 "유기안료는 내후성이 나쁘다"가 아니라 "유기안료는 등급에 따라 내후성 편차가 극단적으로 크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유기안료의 진짜 약점은 내후성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습니다. 하나는 블리딩(bleeding), 즉 색이 수지나 인접 도막으로 번져 나오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뒤에서 다룰 열안정성입니다.


5. 분체도료에만 걸리는 네 가지 족쇄

여기까지는 액체도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분체도료에는 여기에 네 가지가 더 얹힙니다. 이 부분이 "액체도료로는 되는데 분체도료로는 왜 안 되나요"에 대한 답입니다.

족쇄 1. 열이력을 두 번 겪는다

분체도료는 제조 공정에서 원료를 용융 혼련하는 압출(extrusion)을 거치고, 도장 후에는 소부(cure) 공정에서 다시 열을 받습니다. 일반적인 열경화성 분체도료의 표준 소부 조건은 소재 온도 기준 180~200도에서 10~20분입니다.

액체도료 중 상온 건조형이나 저온 경화형은 안료가 이런 열을 겪지 않습니다. 그래서 액체도료에서는 문제없이 쓰이는 안료가 분체도료에서는 탈락합니다. 예를 들어 디아릴라이드(diarylide)계 황색 안료는 200도 이상에서 열적으로 안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밝은 황색을 싸게 만들 수 있는 유력한 선택지 하나가 처음부터 제외되는 셈입니다.

족쇄 2. 현장 조색이 불가능하다

액체도료는 색이 조금 틀어지면 현장이나 대리점에서 착색제를 소량 투입해 맞출 수 있습니다. 분체도료는 불가능합니다. 색을 바꾸려면 원료 칭량부터 압출, 분쇄, 분급까지 제조 공정 전체를 다시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실무에서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소량 주문일수록 색상 개발 비용을 분산시킬 물량이 없어서 단가가 급등하고, 색상 승인이 한 번 어긋나면 리드타임이 통째로 밀립니다. 디자인·설계 단계에서 색상을 미리 확정해 두는 것이 분체도장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족쇄 3. 원칙적으로 1코트다

자동차 외장에서 선명한 적색을 구현하는 방법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은폐를 담당하는 하도 위에 투명감 있는 컬러 베이스를 올리고, 그 위에 클리어를 덮는 다층 구조입니다. 은폐와 발색을 다른 층에 분담시키는 것입니다.

분체도장은 기본적으로 1회 도장, 1회 소부의 단일 도막입니다. 즉 은폐와 발색을 같은 층에서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앞서 본 딜레마 — 은폐를 위해 백색 안료를 넣으면 채도가 떨어지는 문제 — 를 피해 갈 구조적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이 제약이 언제나 불리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액체도료로는 베이스와 클리어를 겹쳐야 하는 메탈릭·펄 효과를 분체도료는 1회 코팅으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단일 도막이라는 구조가, 순색에서는 족쇄가 되고 메탈릭에서는 강점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프라이머를 깔고 상도를 올리는 2코트 분체도장도 가능하고, 자동차 휠용 클리어 분체도료(GMA 아크릴)처럼 투명 도막을 겹치는 방식도 있습니다. 다만 소부를 두 번 하게 되므로 에너지 비용과 생산 시간이 늘고, 하도의 색상 관리라는 변수가 추가됩니다. 도막두께 설계에 대해서는 분체도장 도막두께(DFT)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막두께와 은폐력의 관계

은폐력은 안료만의 성질이 아니라 도막두께와의 곱으로 결정됩니다. 같은 도료라도 60마이크로미터에서는 비치고 90마이크로미터에서는 가려질 수 있습니다. 은폐가 아슬아슬한 색상을 쓸 때, 도료를 바꾸기 전에 도막두께 사양부터 검토하는 것이 훨씬 싸고 빠른 해법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경화제 종류에 따라 올릴 수 있는 두께에 한계가 있으므로 TGIC와 HAA 경화제 비교를 함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족쇄 4. 안료가 수지를 붙잡는다 — 흡유량과 레벨링

앞에서 "고성능 안료를 많이 넣어야 한다"는 말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원가 말고 또 하나의 대가가 따릅니다. 바로 외관, 특히 레벨링(leveling)입니다.

모든 안료는 입자 표면을 적시는 데 일정량의 수지를 소모합니다. 이 성질을 수치로 나타낸 것이 흡유량(oil absorption)으로, 안료 100g을 적시는 데 필요한 아마인유의 양(g)으로 표시합니다(시험법 ISO 787-5). 도료용 루타일 이산화티타늄의 흡유량은 약 20, 비중은 약 4.2 수준입니다. 반면 입자가 미세하고 비표면적이 큰 유기안료나 카본블랙은 흡유량이 이보다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비중 차이가 겹칩니다. 유기안료의 비중은 일반적으로 1.2~1.8 정도로 이산화티타늄의 절반 이하입니다. 같은 무게를 넣어도 도막 속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두세 배가 되고, 그만큼 수지가 적셔야 할 표면이 늘어납니다.

안료 표면에 붙잡힌 수지는 흘러다닐 수 없습니다. 흡유량이 큰 안료를 많이 넣을수록 자유롭게 움직이는 수지가 줄어들고, 소부 시 용융점도(melt viscosity)가 올라갑니다.

원리 심화 — 분체도료 레벨링의 짧은 시간창

분체도료는 소부 오븐 안에서 입자가 녹고, 서로 합쳐지고, 흘러서 평평해지고, 가교 반응으로 굳는 과정을 한 번에 거칩니다. 온도가 오르면 점도가 떨어지다가, 경화 반응이 진행되면서 다시 급격히 올라 겔화(gelation)됩니다.

레벨링은 이 짧은 저점도 구간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흡유량이 큰 안료가 점도의 바닥을 끌어올리면, 도막이 채 펴지기 전에 굳어버립니다. 그 결과가 오렌지필(orange peel), 광택 저하, 그리고 도막 표면에 비친 상의 선명도인 선영성(DOI) 저하입니다.

매끄럽게 레벨링된 도막과 안료 과다로 오렌지필이 생긴 도막의 단면 비교
그림 3. 흡유량이 큰 안료가 많으면 용융점도가 올라가 도막이 펴지기 전에 굳습니다.
교과서와 현장의 간극

교과서적으로는 "안료를 더 넣어 은폐력을 올린다"로 끝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은폐를 맞추자 이번에는 표면이 거칠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액체도료라면 용제나 희석제로 점도를 낮춰 보정할 수 있지만, 분체도료에는 용제가 없습니다. 점도를 낮출 수단은 수지 설계와 흐름 조정제(flow agent) 같은 첨가제 정도로 제한됩니다.

그래서 밝은 옐로처럼 은폐를 위해 안료를 많이 넣어야 하는 색상은 은폐력, 채도, 원가에 이어 외관까지 네 번째 트레이드오프를 안게 됩니다. 체질안료를 줄여 수지의 여유를 확보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만큼 원가와 도막 물성이 함께 달라집니다.


6. 실제로 어려운 색 — 화이트와 밝은 옐로

6-1. 화이트 계열 — 은폐력 그 자체가 과제

의외라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백색은 이산화티타늄이라는 최강의 산란 안료를 쓰는데 왜 어려울까요.

백색은 은폐를 오로지 산란에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흡수가 전혀 없으므로 도와줄 두 번째 메커니즘이 없습니다. 검정은 반대로 카본블랙이 빛을 거의 전부 흡수해 버려서 얇게 발라도 가려집니다. 백색은 그런 편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백색은 불량이 가장 잘 보이는 색이기도 합니다. 소지의 얼룩, 전처리 편차, 도막두께 불균일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전처리 공정의 편차가 백색에서 유독 문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6-2. 밝은 옐로 계열 — 은폐력과 채도가 동시에 걸린다

현장에서 가장 자주 부딪히는 벽입니다. 밝은 황색은 은폐력과 색상 구현이 동시에 어려운 거의 유일한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유기 황색 안료 단독, 이산화티타늄 첨가, 목표 색상의 세 단계 비교
그림 4. 은폐를 얻으면 채도를 잃습니다. 밝은 옐로 개발의 딜레마입니다.
밝은 황색 구현 시 선택지별 한계
선택지장점한계
유기 황색 안료 단독 채도가 높고 선명함 은폐가 안 됨. 소지가 비침
유기 황색 + 이산화티타늄 은폐 확보 백색이 섞이며 채도 하락, 색이 뿌예짐
납크롬산염계(황색·주황·적색) lead chromate 은폐력과 채도를 동시에 만족 규제로 사실상 사용 불가
비스무트 바나데이트(황색) PY184 은폐력 양호, 내후성 우수 고가. 열·화학 안정성에 한계가 보고됨
복합무기안료(황색·청색·녹색·갈색 등) CICP 내열·내후성 최상급 채도가 낮아 밝은 색이 안 나옴
규제가 바꿔 놓은 색상 지도

과거에는 밝은 황색과 적색의 정답이 명확했습니다. 납크롬산염(lead chromate) 계열 안료가 은폐력과 채도를 동시에 만족시켰기 때문입니다. RAL 1003(Signal Yellow), RAL 1023(Traffic Yellow), RAL 3020(Traffic Red), RAL 3000(Flame Red) 같은 색상이 이 안료로 배합되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납크롬산염, 납 설포크롬산염 옐로(C.I. Pigment Yellow 34), 납 크롬산몰리브덴산 설페이트 레드(C.I. Pigment Red 104)는 EU REACH 규정의 허가대상물질 목록(Annex XIV)에 등재되었고, 일몰일자(sunset date)는 2015년 5월 21일이었습니다. 이후 유럽 시장용 제품에서는 대체가 불가피해졌습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지점을 하나 짚어 둡니다. 채도만 놓고 보면 위 RAL 색상들은 현대 유기안료로 도달 가능한 범위 안에 있습니다. 실제로 주요 유기안료들의 채도가 이들 RAL 색상보다 높다는 비교 데이터가 보고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채도 단독이 아니라 채도 · 은폐력 · 내후성 · 원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조합을 찾는 일입니다. 네 가지를 한꺼번에 맞추려 할 때 선택지가 급격히 좁아집니다.

그리고 하나 더. 목표 색상이 붉은 쪽으로 갈수록 필요한 유기안료 투입량이 늘어납니다. 이것이 밝은 적색·오렌지 계열의 단가가 유독 비싼 직접적인 이유이며, 앞서 본 흡유량에 의한 레벨링 저하까지 함께 관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디자인 단계에서 "왜 이 빨강만 비싼가"라는 질문의 답이 여기 있습니다.


7. 색차값이 말해주지 않는 것

여기까지는 "어떤 색이 가능한가"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실제 색상 개발 현장에서 벌어지는, 조금 다른 층위의 어려움을 다룹니다.

7-1. 양산 관리의 기준

분체도료 양산에서 색상은 색차(color difference)로 관리합니다. 기준 색상과 생산 색상을 분광측색계로 측정해 L*a*b* 좌표를 구하고, 그 차이를 하나의 숫자로 환산한 것이 ΔE입니다. 현장에서는 그리스 문자 델타를 쓰기 번거로워 dE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정식 표기는 ΔE입니다.

국내 분체도료 양산에서 널리 쓰이는 식은 CIE 1976 기준의 ΔE*ab이며, 일반적인 관리 기준은 ΔE 1.0 이하입니다. 색상 특성이나 고객 요구에 따라 더 타이트하게 가져가기도 하고, 단일 ΔE 값 대신 L*, a*, b* 각각의 편차를 별도로 관리하기도 합니다.

ΔE*ab = √ ( ΔL*2 + Δa*2 + Δb*2 ) L* = 명도, a* = 적-녹 축, b* = 황-청 축. CIE 1976 색차식. 세 축의 차이를 단순한 유클리드 거리로 계산합니다.
CIELAB 색공간의 L*, a*, b* 축과 두 색 사이의 색차 거리
그림 5. CIELAB 색공간. ΔE*ab는 두 색 좌표 사이의 직선 거리입니다.

7-2. 그런데 ΔE 1.0은 언제나 같은 1.0이 아니다

이 지점이 색상 개발의 핵심입니다. 위 식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세 축의 차이를 단순한 직선 거리로 계산합니다. 이 계산이 성립하려면 L*a*b* 색공간이 "같은 거리는 같은 정도로 다르게 보인다"는 성질, 즉 지각적 균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CIELAB 색공간은 지각적으로 균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색채공학계에서 오래전에 확인된 사실이며, 바로 이 비균일성을 보정하기 위해 CIE94, CIEDE2000 같은 후속 색차식이 만들어졌습니다.

원리 심화 — 비균일성이 나타나는 방향

사람의 시각은 무채색에 가까운 영역에서는 채도 변화에 민감하고, 고채도 영역에서는 같은 크기의 채도 변화에 둔감합니다. 또한 색상각(hue angle)에 따라서도 허용 한계가 달라집니다. 즉 같은 ΔE*ab = 1.0이라도, 연한 회색에서는 명확히 보이는 차이일 수 있고 진한 빨강에서는 알아채기 어려운 차이일 수 있습니다.

CIEDE2000이 명도·채도·색상 각각에 가중치를 적용하고 색상 회전 보정까지 넣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만 두 식은 서로 환산 계수가 없으므로, 사양서에 색차 기준을 적을 때는 어느 색차식인지를 반드시 함께 명시해야 합니다. 고객이 ΔE00 기준 1.0을 요구하고 공급사가 ΔE*ab 기준 1.0으로 관리하면, 양쪽 모두 같은 기준이라 믿으면서 실제로는 다른 관리를 하게 됩니다.

7-3. 같은 색이 조명에 따라 달라 보이는 문제

또 하나의 함정이 메타머리즘(metamerism)입니다. 서로 다른 안료 조합으로 만든 두 색이 특정 조명 아래에서는 동일하게 보이지만, 조명을 바꾸면 눈에 띄게 달라지는 현상입니다.

분체도료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잘 생깁니다. 기준 샘플과 같은 안료를 쓸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플라스틱 사출물이거나 액체도료 도장품이면, 그쪽에서 쓴 안료를 분체도료에 그대로 쓸 수 없는 일이 흔합니다. 열이력을 못 견디거나, 분산이 안 되거나, 단가가 맞지 않습니다. 다른 안료 조합으로 같은 좌표를 맞추면 메타머릭 페어(metameric pair)가 만들어지고, 색상 승인은 통과했는데 현장 조명에서 "다르다"는 클레임이 들어옵니다.

이것이 색상 승인을 D65 같은 표준 광원 아래에서, 가능하면 복수 광원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7-4. 소재와 광택이 만드는 벽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남습니다. 기준 색상이 다른 소재, 다른 광택에서 온 경우입니다.

플라스틱은 반투명해서 빛이 표면 아래로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래서 색에 깊이감이 생깁니다. 아노다이징 알루미늄은 산화피막의 방향성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바뀝니다. 고광택 도막은 정반사 성분이 크기 때문에 같은 색이라도 저광택 도막보다 더 진하고 깊어 보입니다.

같은 적색을 플라스틱, 아노다이징 알루미늄, 고광택 분체도막, 무광 분체도막으로 구현한 비교
그림 6. 같은 색상 좌표라도 소재와 광택에 따라 눈에 보이는 인상이 달라집니다.

분체도막은 이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불투명한 고체 도막이고, 광택은 도료 배합으로 결정됩니다. 측색기가 읽는 좌표는 맞출 수 있어도, 사람 눈이 받아들이는 인상은 맞출 수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필자의 생각 — 색상 개발이라는 일의 본질

색차값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감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영역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합니다.

기준이 되는 색상은 그 색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재와 그 광택에서 나오는 눈에 인식되는 효과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소재, 다른 광택인 분체도료로 옮겨 오는 일에는 원리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색상 개발은 숫자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는 지점에서 맞추는 일입니다.

컬러리스트의 판단이 개입하는 것은 공정이 부실해서가 아닙니다. ΔE*ab라는 지표 자체가 사람의 지각을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마지막 구간은 결국 눈이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측정 장비가 좋아진다고 사라지는 종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8. 발주 전 체크리스트

디자인·설계 담당자가 분체도장 색상을 지정할 때, 아래 항목을 미리 정리해서 전달하면 개발 기간과 비용이 크게 줄어듭니다.

FIELD CHECK — 색상 지정 시 함께 전달할 정보
  • 색상 지정 방식을 명확히 — RAL, Pantone, 먼셀, 또는 실물 샘플 중 무엇인지. 실물 샘플이라면 그 샘플의 소재와 광택이 무엇인지 반드시 함께 알려 주십시오. 플라스틱 샘플과 도장 샘플은 출발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 광택을 색상과 함께 지정 — 광택이 달라지면 같은 색도 다르게 보입니다. 광택 지정 없이 색만 주면 승인 단계에서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60도 광택 기준 몇 퍼센트인지 명시하십시오.
  • 허용 색차와 색차식을 함께 명시 — "ΔE 1.0 이하"가 아니라 "ΔE*ab(CIE 1976) 1.0 이하, D65 광원 기준"처럼 적어야 합니다. 색차식을 빼면 공급사와 다른 기준으로 관리하게 됩니다.
  • 도막두께 사양을 확인 — 은폐가 빠듯한 색상은 도막두께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소 도막두께를 낮게 잡아 두면 도료 선택지가 좁아집니다.
  • 하도 유무와 하도 색상 — 프라이머를 쓴다면 그 색이 상도 색상에 영향을 줍니다. 밝은 색에는 밝은 하도가 유리합니다.
  • 실내용인지 외부 노출인지 — 외부 노출이면 내후성 등급이 필요하고, 쓸 수 있는 안료가 크게 줄어듭니다.
  • 연간 예상 물량 — 색상 개발 비용은 물량으로 분산됩니다. 소량이면 기성 색상 중에서 근접한 것을 고르는 편이 합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9. 정리

이 글의 요점

1. 색은 흡수(색상)와 산란(은폐력)이라는 독립된 두 현상으로 만들어집니다. 안료를 더 넣는다고 은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2. 은폐력은 안료와 수지의 굴절률 차이에서 나옵니다. 유기안료는 수지와 굴절률이 거의 같아 색은 내되 가리지는 못합니다.

3. 분체도료는 두 번의 열이력, 현장 조색 불가, 원칙적 1코트, 그리고 용제 없이 용융 흐름만으로 레벨링해야 한다는 네 가지 제약을 추가로 안고 있습니다. 은폐를 위해 안료를 늘리면 흡유량 때문에 외관이 나빠집니다.

4. 화이트는 산란만으로 은폐해야 하고, 밝은 옐로는 은폐력과 채도가 동시에 걸립니다. 납크롬산염 규제 이후 이 영역의 난이도가 올라갔습니다.

5. ΔE*ab는 지각적으로 균일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구간에서 사람의 눈이 개입하는 것은 공정의 결함이 아니라 지표의 구조적 한계입니다.

색상에 대한 "안 됩니다"라는 답은 대부분 원리적 제약과 규제, 그리고 원가의 합에서 나옵니다. 그 구조를 알고 있으면 협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색은 안 되나요"가 아니라 "도막두께를 90마이크로미터로 올리면 가능한가요", "채도를 조금 양보하면 단가가 얼마나 내려가나요"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 글이 그 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고자료

  1. SpecialChem, Titanium Dioxide (TiO2) Pigment for Paints, Coatings & Inks — 바인더 굴절률 약 1.55, 최적 산란 입경(파장의 약 1/2, 가시광 기준 약 280nm)
  2. SpecialChem, Hiding Power in Coatings: Understanding, Factors, and Technologies — 은폐력의 정의와 굴절률 차이에 의한 산란 메커니즘
  3. PCI Magazine, Lead Chromate Replacement (2015) — RAL 1003 / 1023 / 3020 / 3000의 납크롬산염 배합 관행, 유기안료와 납크롬산염의 채도 비교
  4. ECHA / EU REACH Regulation (EC) No 1907/2006, Annex XIV — 납크롬산염, C.I. Pigment Yellow 34, C.I. Pigment Red 104 등재, 일몰일자 2015년 5월 21일
  5. ISO 787-5, General methods of test for pigments and extenders — Part 5: Determination of oil absorption value — 흡유량 시험법
  6. UL Prospector, Effect of Pigment Volume Concentration on Coatings Properties – Part II — 루타일 이산화티타늄 흡유량 약 20, 비중 약 4.2, 흡유량·비중이 클수록 CPVC 감소
  7. CIE 15: Colorimetry / ISO-CIE 11664-4 — CIELAB 색공간 및 ΔE*ab 색차식 정의
  8. CIE 142-2001, Improvement to Industrial Colour-Difference Evaluation — CIEDE2000 색차식, CIELAB의 지각적 비균일성 보정
  9. Luo, M.R., Cui, G., Rigg, B., The Development of the CIE 2000 Colour-Difference Formula: CIEDE2000, Color Research & Application, 2001
  10. Datacolor, CIELAB and CIE2000 Color Systems — 색차식 간 환산 계수 부재, 사양서 기재 시 색차식 명시의 필요성